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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전쟁, 여성, 기억을 통해 본 한국 근현대사

비비비키 2025. 6. 3. 22:10

 한국 문학사에서 박완서라는 이름은 곧 ‘삶의 진실을 꿰뚫는 눈’을 상징합니다.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을 지나 2000년대를 살았던 박완서라는 작가의 글은 책을 읽는 우리들에게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향수를 느끼게 한다.

 그중에서도 자전적 회고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그녀의 유년 시절과 성장기를 섬세하게 담아낸 작품으로, 1930~1950년대 한국 사회의 변화와 격동을 온몸으로 겪어낸 한 여성의 내면을 진실하게 그려냅니다.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이나 시대극이 아닙니다. 개인의 기억을 통해 민족의 역사, 여성의 위치, 가족의 의미까지 다층적으로 조망하는 문학적 기록입니다. 본 서평에서는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시대상, 여성 서사의 가치, 그리고 ‘기억’이 문학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작품의 깊이를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1. 시대의 굴곡 속 성장한 소녀의 시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해방, 한국전쟁 전후의 혼란기까지의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주인공인 ‘나’는 박완서 본인의 자전적 인물이자, 그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보통 사람들을 대변합니다. 이 소설의 백미는 바로 ‘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입니다.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 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낯설고도 신선하게 포착됩니다.

경성에서 시작된 그녀의 이야기는 ‘평범한 유년’으로 출발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현실은 점차 차가워집니다. 일제의 교육과 강압, 전쟁의 그림자, 남북분단이라는 거대한 역사 앞에서 주인공은 종종 무력함을 느끼고, 때론 반항심과 혼란스러운 감정을 겪습니다. 이처럼 작가는 시대의 흐름을 대단한 사건이나 정치적 분석이 아닌, ‘한 아이가 겪는 경험’으로 담담히 묘사합니다. 그 점이 독자에게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줍니다.

이러한 서사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시대의 일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동시에 이 소설은 단순히 ‘그땐 그랬지’ 식의 향수에 그치지 않고, 왜곡되지 않은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이 책은 일제 말기~해방~전쟁이라는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살아낸 사람들의 감정을 정제된 언어로 끄집어내며, 오늘날에도 유효한 통찰을 전합니다.

2. 여성의 삶과 글쓰기: 침묵을 깨는 기록

 

이 책은 단순히 한 시대의 기록이 아니라 ‘여성의 시선’으로 그려낸 역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박완서는 유년 시절부터 ‘말하기 어려운 감정’과 ‘이해되지 않는 사회적 질서’에 대한 문제의식을 내면화하며 성장합니다. 남성 중심적 질서, 전통적 가족 구조, 교육의 차별성 등은 그녀에게 자연스러운 현실이지만, 동시에 내면의 갈등과 질문을 유발하는 요소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박완서의 서사는 ‘말하지 않으면 사라질 여성들의 역사’를 꿰뚫습니다. 가부장제 하의 여성 교육, 결혼에 대한 가치관, 어머니와의 관계 등은 단순한 개인사가 아닌, 당시 여성 모두가 겪었을 보편적 경험으로 읽힙니다. 특히 ‘어머니’라는 인물은 이 작품의 핵심 축으로, 그녀의 강인함과 침묵 속에 감춰진 희생은 후대 여성 서사의 밑거름이 됩니다.

더불어 작가는 회고의 형식을 빌려 ‘여성의 글쓰기’가 가지는 치유의 힘을 드러냅니다. 억압 속에서도 견디고 살아온 기억을 써내려간다는 것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 ‘존재의 확인’이자 ‘자기 정체성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한 개인의 회고록이 아니라, 한국 여성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목소리로 남습니다.

3. 기억의 재구성과 문학적 완성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문학적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박완서는 이 회고록을 통해 ‘기억의 서사화’가 얼마나 강력한 문학적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녀는 때로는 감정적으로,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독자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왜 우리는 그 시절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을까?” “그 많던 싱아는 왜 모두 사라졌는가?”

‘싱아’는 단순한 풀 이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풍요, 유년, 희망, 혹은 사라진 과거의 은유로서 기능합니다. 제목에 담긴 물음은 곧 이 책 전반을 관통하는 질문입니다. 작가는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고, 그 시절을 겪어낸 수많은 사람들에게 문학적 헌사를 바칩니다. 이를 통해 그녀는 ‘기억의 틀’을 넘어서, 그것을 재조립하여 새로운 감동을 창조합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 모든 과정이 ‘담담한 어조’로 이뤄진다는 점입니다. 박완서의 문체는 극적인 연출이나 과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담백하고 절제된 문장들이 더 큰 울림을 줍니다. 이 점에서 그녀는 단순한 회고자가 아니라, 기억의 문지기이자 문학적 조율자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한 개인의 성장기이자, 한국의 격동기를 담은 소중한 역사적 기록입니다. 박완서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솔직하고도 담담하게 풀어내며, 시대의 아픔과 함께 여성의 삶, 가족의 구조, 인간의 내면까지 깊이 있게 성찰합니다. 그녀의 문장은 조용하지만 강하고, 짧지만 깊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을 넘어, ‘기억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문학적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책은 묻습니다. “그 많던 싱아는 정말 다 사라졌을까?” 우리는 그 시절의 경험과 감정을 잊지 말고, 오늘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싱아’를 피워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작품은 그 첫 번째 질문을 던지는 고요하고도 힘 있는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