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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진의 <파친코>

     

    이미진 작가의 『파친코』는 단순한 이민 서사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부터 말까지, 네 세대에 걸친 한 가족의 일본 내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통해, 역사적 맥락 속에서 개인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전쟁, 가난, 차별이라는 현실의 벽을 딛고 생존을 이어간 이 가족의 이야기는,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조선인 디아스포라’의 현실을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이 글에서는 『파친코』 속 중심 테마인 디아스포라, 가족 서사, 정체성을 중심으로 이 작품이 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디아스포라와 이방인의 삶

    『파친코』의 핵심 배경은 191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 내 조선인 이주입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현실 속에서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들은 일본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 소설은 바로 그 ‘경계인’의 시선을 통해 역사의 사각지대를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주인공 선자는 조용한 어촌 마을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이주하면서 전혀 다른 삶의 무게를 짊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의 이민이 자발적인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결정이었다는 점입니다. 『파친코』는 이민자라는 단어가 담지 못하는 폭력적 현실과 구조적 차별을 날카롭게 포착합니다.

    작품 속 일본 사회는 조선인을 ‘영원한 타자’로 규정합니다. 학교, 직장, 심지어 병원조차 조선인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들은 자신을 숨기고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가족들은 끈질기게 버티고, 일하고, 자녀를 교육시키며 존엄을 지켜냅니다.

    ‘파친코’는 단순한 도박 사업이 아니라, 그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상징입니다. 불법과 경계 위에서 살아남기 위한 파친코 산업은, 이들이 일본 내에서 어떻게 자신만의 자리를 확보했는지를 보여주는 사회적 은유입니다. 『파친코』는 우리에게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닌,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방인의 현실을 상기시키는 작품입니다.


    가족 서사 속 세대 간 연결

    『파친코』는 선자를 중심으로 4대에 걸친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이 서사 구조는 단순한 가계도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생존의 최소 단위이자, 정체성과 가치관을 물려주는 교육의 장이기도 합니다.

    선자의 아버지가 평범하고 조용한 삶을 살다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가족은 여성 중심의 생존 전략을 구축합니다. 선자는 어린 나이에 고난을 겪지만,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일본행을 결심하고, 낯선 땅에서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갑니다. 그녀의 삶은 헌신의 연속이었고, 그 헌신은 자녀와 손자에게도 이어집니다.

    이 소설의 강점은, 각 세대의 삶이 단절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데 있습니다. 선자의 아들 노아는 정체성 혼란 끝에 일본인으로 살아가려 하지만, 결국 비극적인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손자 솔로몬은 기업 세계에 진입하며 '성공'을 꿈꾸지만, 그 역시 조선인으로서의 한계를 실감합니다.

    이처럼 『파친코』는 세대 간 전해지는 감정과 가치, 그리고 상처를 서사 전반에 배치하며 독자로 하여금 ‘우리는 누구의 흔적 위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가족은 단지 피를 나눈 공동체가 아니라, 시대와 기억, 선택의 결과가 고스란히 축적된 '작은 역사'인 셈입니다.


    정체성의 혼란과 자기 발견

    『파친코』에서 정체성은 끝없이 흔들리는 주제입니다. 선자와 그녀의 후손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쓰며 살아가지만, 어디까지나 ‘조선인’으로 구분됩니다. 이 이중적 위치는 그들에게 끊임없는 정체성 혼란을 야기합니다.

    노아는 뛰어난 두뇌를 가졌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입시와 취업에서 차별을 받습니다. 그는 끝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일본인으로 살아가려 하지만, 그것은 자아의 분열이라는 더 큰 고통을 낳습니다. 그의 선택은 결국 비극으로 귀결되고, 이는 작가가 정체성의 외면이 가져올 수 있는 파괴력을 날카롭게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반면 손자 솔로몬은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찾으려 합니다. 그는 미국 유학과 글로벌 기업 입사를 통해 다국적 정체성을 획득하려 하지만, 시스템은 그에게 일본 사회의 한계를 끊임없이 상기시킵니다.

    이처럼 『파친코』는 단지 민족 정체성뿐 아니라, 계급, 성별, 사회적 역할 속에서 개인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작가는 ‘정체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인물의 삶에 구체적으로 녹여내며, 독자에게도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결론 

    『파친코』는 단순한 이민 소설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개인이 사회적 억압을 어떻게 견디고, 그것을 어떻게 자신의 삶으로 전환해내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문학적 기록입니다.

    특히 이미진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말하지 못했던 역사', '기록되지 않았던 사람들'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가시화합니다. 독자는 선자의 삶을 따라가며, 조선인 디아스포라가 일본 사회에서 겪은 차별과 고통,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난 연대와 사랑을 마주하게 됩니다.

    『파친코』는 가족이라는 개인적인 서사를 통해, 민족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을 설명하고, 개인과 국가, 역사와 현재를 연결짓는 깊은 사유를 이끌어냅니다. 문학이 가지는 힘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드러납니다.

    차별과 편견, 소속감의 결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파친코』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는 질문이자 메시지입니다. 당신이 속한 세계에서, 당신은 누구인가? 그 정체성은 어디에서 왔고,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이 책은 그 질문에 쉽게 답하지 않지만, 독자가 그 답을 스스로 찾아가게 만듭니다. 아직 읽지 않았다면,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있다면, 『파친코』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입니다.